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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희 (黃喜, 1363~1452)
누구에게나 청백리이자 명재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며 조선조 최장수 재상입니다. 황히는 정치 일선에서 원칙과 소신을 견지하면서도 때로는 관용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건국 초기 조선의 안정에 기여하였습니다.

 

<육룡이 나르샤 38회>

기록에 의하면 조선 건국 이래 500년 역사에서 총 18명의 청백리가 있는데, 그 중 단연 으뜸은 건국 후 태종과 세종 그리고 문종에 걸쳐 3대를 보좌한 황희 정승입니다. 자신이 반대했던 왕 세종의 두터운 신임으로 무려 18년간을 영의정을 지낸 황희의 리더십과 처세학은 한마디로 '관용과 원칙이 완벽히 조율된 인품'의 승리입니다.

 

황희는 고려 말 공민왕 치세 1363년에 개성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가 강원도관찰사를 지내는 등 대를 잇는 명문가였습니다. 황희는 신분 제도만으로도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지만, 공양왕 원년 1389년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지만 곧 고려가 망하자 그는 원대한 꿈을 일단 접고 개풍 광덕산 두문동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유명한 '두문불출'이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진 지역이자 역사적 사건입니다.

 

역성혁명에 성공한 이성계는 고려의 인재들을 개국 작업에 동참시키려 애를 썼으나 두문동에 모인 73인의 고려 충신들은 부름을 거부하며 농성에 들어갔으며, 그곳에 황희도 있었지만 얼마 뒤 그는 두문동을 나옵니다. 황희의 재주를 아끼고 사랑한 훗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의 간곡한 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같이 있던 두문동 72현의 청이 더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황희에게 "당신은 나가서 백성을 돌봐야 한다"는 말로 황희를 설득한 것입니다.

 

 

육룡이 나르샤 황희 두문동사건

 

 

황희는 태종보다 4살 연상이었지만 태종 이방원은 황희를 동년배의 친구처럼 아끼고 배려했으며, 즉 황희의 재목을 알아본 것입니다. 하지만 황희에게도 위기가 찾아오는데, 바로 세자 책봉에 관한 문제입니다.

 

1418년 태종은 세자인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3남인 충령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결심을 굳혔는데, 모든 대소 신료들은 태종의 강한 뜻을 알고 양녕의 폐위에 찬성했지만 황희만은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장자 승계의 원칙과 양녕의 교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황희의 명분이었습니다. 태종은 황희의 반대에 충격을 받았지만 그를 궁에서 가까운 교하(지금의 파주와 일산 중간)로 귀양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한편, 황희에 대해서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던 태종은 세종에게 "황희가 비록 귀양 가 있으나 잊지 말고 중하게 쓰라"는 어지를 남겼고, 태종이 죽고 세종이 즉위했습니다.

 

남다른 성군이었던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말을 받들어 황희를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사실 자신의 세자 책봉을 선두에 서서 반대했던 신하를 자신이 벼슬을 주고 복권을 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노릇었지만, 그런 면에서 세종의 마음이 얼마나 큰 그릇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종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들어온 황희는 당시 60세, 은퇴를 앞둔 나이이지만 무려 20여년이 넘게 재상으로 활약하며 그 중에서 18여년을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영의정으로 재임하며 조선 최고의 전성시대인 세종의 성군시절에 큰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나이 90세에 은퇴해 경기도 파주에 반구정이란 정자를 짓고 말년을 보내며 후대에 큰 덕을 남겼습니다.

 

 

[육룡이 나르샤] 황희(권시현) '정안대군' 이방원 복수 위해 등장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