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죽교 善竹橋 (경기도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돌다리)
원래 이름은 선지교라 하였으며, 다리의 동쪽에 한석봉(韓石峯) 글씨의 비(碑)가 있습니다. 선죽교 이 다리는 고려 말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하고 오다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 4, 5인의 철퇴에 맞아 피살된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 돌다리에는 아직도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 있습니다. 주위에 두른 석란은 1780년(정조 4)에 가설하였고 옆에 비각이 있는데 정몽주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개가 들어 있습니다.
* 포은 정몽주 鄭夢周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정몽주는 공양왕 옹립에는 정도전·이성계 같은 역성혁명파와 뜻을 같이했지만,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데는 반대했습니다. 그리하여 기회를 보아 역성혁명파를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마침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을 배웅하러 나갔던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병석에 눕게 되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준 등 역성혁명파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이방원이 이성계를 급히 개성에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고, 이어 정세를 엿보기 위해 이성계를 찾아가 문병을 하고 귀가하던 도중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 등의 습격을 받아 죽었습니다.
* 조영규 趙英珪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일찍이 이성계의 사병으로서 천거로 벼슬에 올라, 1385년(우왕11) 판위위시사가 되어 함주일대에 창궐하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하여 이성계의 휘하에 종군,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 뒤 여러 차례 왜구토벌전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습니다. 1392년(공양왕4) 이방원과 모의하여 이성계의 문병을 마치고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격살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해 정도전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예조전서에 올랐다가 1395년 병으로 죽었으며, 참찬문하부사에 추증되었습니다.
한편, 육룡이 나르샤 36회 예고편에서 이방원은 "백성들에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저 만수산 칡넝쿨이 저리 얼켜 있다한들 그것을 탓하는 이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라고 하여가를 말했고, 이에 정몽주는 "나를 죽이고 죽여 일백번을 죽여 보시게. 백골이 다 썩어 나가고 몸뚱아리가 흙이 되어 먼지가 된다한들. 이 몸안에 있었던 한조각 충을 향한 붉은 마음을 일편단심 가지지 못할 것이네"라며 단심가로 답했습니다.
'육룡이 나르샤' 피의 선죽교 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