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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화도회군 (威化島回軍)

1388년(우왕 14) 명나라의 '요동(遼東)'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던 이성계 등이 위화도에서 회군해 우왕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 역사적 배경: 당시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는 명나라가 무리한 공물을 요구해 매우 긴장되어 있는 상태, 1388년에는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해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도사(遼東都司)의 관할 아래 두겠다고 통고해 왔고, 이에 고려가 크게 반발해 결국 요동정벌로 이어졌습니다.

 

요동정벌이 단행될 때, 수문하시중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할 뿐 아니라,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고 왜구가 창궐할 것이며,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4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반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우왕과 문하시중 최영이 강력하게 주장해 요동정벌이 실행되었습니다.

 

이에 따라서 고려에서는 8도의 군사를 징집하는 한편, 세자와 여러 비들을 한양산성으로 옮기고 찬성사 우현보로 하여금 개경을 지키게 한 뒤 우왕과 최영은 서해도로 가 요동정벌의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이해 4월에는 우왕이 봉주에 있으면서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임명하고, 창성부원군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습니다.

 

이때 동원된 총 병력은 좌·우군 3만 8,830명과 겸군 1만 1,600명, 그리고 말 2만 1,682필이었습니다. 곧이어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 머물면서 독전하고,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좌·우군은 10만 대군을 자칭하면서 평양을 출발해 다음 달에 위화도에 둔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도망치는 군사가 속출했고, 마침 큰비를 만나 압록강을 건너기가 어렵게 되자, 이성계는 이러한 실정을 보고하면서 요동정벌을 포기할 것을 우왕에게 요청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요동정벌을 독촉하자,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한 뒤 회군을 단행하였습니다.

 

- 결과: 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 등은 최영의 군대와 일전을 벌인 끝에 최영을 고봉현으로 유배하고 우왕을 폐위해 강화도로 방출하였습니다. 이로써 이성계 등은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전제개혁을 단행, 조선건국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지만 회군 당시부터 이미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의지가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육룡이 나르샤' 조선 건국 향한 '위화도회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