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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1327~1405)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승려입니다. 속성은 박이고 이름은 자초이며, 법명은 무학·계월헌입니다. 조선 태조에 의해 왕사가 되었으며, 한양천도를 도왔습니다.
'새 서울에 이르러 옛 한양부의 객사를 이궁으로 삼았다(至新都 以舊漢陽府客舍爲離宮)'
조선왕조실록 태조 3년 10월 28일의 기록입니다. 한양 천도의 주역은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이며, 개경의 지력이 쇠했다는 풍수지리설에 근거, 터전을 새로 닦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정치적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개경 일대에 땅이 많은 개국공신들의 권력 약화를 통한 왕권 강화였습니다.
민심도 두려웠습니다. 고려의 충신 최영 장군을 처형할 때 상인들이 동맹 철시하고 정몽주를 흠모하던 개경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태조가 잠시 머무는 행궁이 아니라 눌러앉으며 이듬해인 1393년에는 이름도 한양에서 한성부를 바꿨습니다.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벼슬을 내던지고 개경 부근 두문동에 낙향한 선비 72명이 조정 출사를 재촉하며 마을을 불태우는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두문불출한 채 불타 죽은 사건 이후 이성계는 구 왕도 개경으로의 환궁에 대한 미련을 털어버렸습니다.
조선 개국과 동시에 나온 천도 논의가 구체화한 것은 이듬해 1월이며, 이성계 스승 무학대사가 꼽은 첫 후보지 개룡산 부근은 국토의 중앙이 아니라는 이유로 10개월 만에 공사를 접었습니다. 하륜이 제시한 신촌과 연희동 등 무악 일대도 장소가 비좁다는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천도작업이 번번이 제지되자 태조는 '고구려나 백제ㆍ신라가 도읍했던 곳이라도 가겠다'며 신하들을 다그쳤습니다. 그만큼 개경이 싫었습니다.
한양이 도읍지로 정해진 것은 개국 2년만인 1394년 8월입니다. 정도전의 건의에 따랐고,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이 제시한 경제적 이유가 먹혀들었습니다.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쌀 같은 곡식으로 받던 시대에 지방 창고의 조세미를 서울의 창고로 운반하는 조운선이 들어오고 나가기에 한양은 천혜의 조건을 갖고 있었습니다.
천도 이후 '왕자의 난'을 겪으며 왕궁이 개경으로 잠시 돌아간 적이 있었어도 한양은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주인공인 태종 이방원 이후부터는 조선왕조 내내 도읍으로 자리를 지켰습니다. 태조가 한양으로 들어온 입경일 10월 28일은 정도 600주년인 1994년부터 '서울 시민의 날'로 내려옵니다.
한양 천도의 동력은 조선 건국에서 나왔지만 천도 자체는 해묵은 과제였습니다. 공민왕 시설부터 우왕, 창왕에 이르기까지 고려를 중흥시킬 지력을 지닌 수도 이전을 추진했으나 여말 혼란기에 궁핍해진 재정에 번번이 막혔습니다. 한양 천도는 50년 이상 세월을 거치며 꾸준하게 논의된 끝에 결정됐던 셈이며, 순식간에 결정해 땅과 강을 파헤치는 행태는 유전인자로 내려온 게 아니라 시대의 돌연변이인 모양입니다.
육룡이 나르샤 무명 '천지비' 궐지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