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룡이 나르샤 조말생역, 육룡이 조말생 이방지, 육룡 조말생 실존인물, 조말생 이방원, 조선 조말생 황희, 뿌리깊은나무 조말생 밀본, 세종 조말생, 황희 조말생, 이방지 조말생, 이방원 조말생
* 조말생 趙末生
조선 초기의 문신입니다. 함길도관찰사로 부임해서는 여진족 방어에 힘썼고, 경상·전라·충청 3도의 도순문사로 나가서는 축성 사업을 벌였습니다.
본관은 양주이고 자는 근초·평중, 호는 사곡·화산입니다. 정몽주의 제자 성리학자 조용의 문인입니다. 1401년(태종1)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요물고부사에 임용되었고, 감찰·정언·헌납 등 청요직을 역임하였습니다. 1407년 문과중시에 둘째로 급제하고 전농시부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장령을 거쳐 주로 예문관·승정원에서 근무하였습니다.
1418년 이조참판에 제수되고 이해에 형조판서로 승진하였습니다. 세종 즉위 후에 주문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27년(세종9) 병조판서 때 그의 명의로 왜국에 보낸 국서에,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경주)에 예속된 우리 영토라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그 후 함길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여진족 방어에 힘썼고, 1435년 판중추부사를 거쳐 1437년 경상·전라·충청 3도의 도순문사로서 축성 사업을 감독하였습니다.
<육룡이 나르샤 35회>
개경으로 무사하게 되돌아온 이방원은 "모두들 고맙소. 이 은혜 잊지 않겠소"라고 고마움을 말했고, 이어 조말생에게 "빚을 졌다. 갚을께"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조말생은 "장군이 살아야 빚을 갚을게 아니오. 무운(武運)을 빕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이방원은 조말생에게 "이름이 뭐냐?"라고 물었고, 이에 조말생은 "말생이오. 조말생!"라고 답했습니다. 이방원은 "말생! 이름이 왜 그래?"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한편, 조말생(최대훈 분)은 실제 역사 속 조선의 문신으로 태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정언, 감찰, 헌납 등을 지냈습니다. 또한 조말생은 태종 이방원의 각별한 총애를 받은 것으로 유명한 역사적 인물이며 세종 때에는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고 전해졌습니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조말생은 태종때 왕의 비서실장과 같은 지신사(도승지) 역. 태종 이방원의 심복으로, 태종이 무인정사 이후 소탕하고자 했던 밀본 수사에 앞장섰습니다. 밀본에 대해서 누구보다 방대한 정보를 갖고 있으며, 그 정보를 바탕으로 밀본의 실체에 접근해 갔습니다.
육룡이 나르샤 조말생
<육룡이 나르샤 38회>
기록에 의하면 조선 건국 이래 500년 역사에서 총 18명의 청백리가 있는데, 그 중 단연 으뜸은 건국 후 태종과 세종 그리고 문종에 걸쳐 3대를 보좌한 황희 정승입니다. 자신이 반대했던 왕 세종의 두터운 신임으로 무려 18년간을 영의정을 지낸 황희의 리더십과 처세학은 한마디로 '관용과 원칙이 완벽히 조율된 인품'의 승리입니다.
황희는 고려 말 공민왕 치세 1363년에 개성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가 강원도관찰사를 지내는 등 대를 잇는 명문가였습니다. 황희는 신분 제도만으로도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지만, 공양왕 원년 1389년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지만 곧 고려가 망하자 그는 원대한 꿈을 일단 접고 개풍 광덕산 두문동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유명한 '두문불출'이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진 지역이자 역사적 사건입니다.
역성혁명에 성공한 이성계는 고려의 인재들을 개국 작업에 동참시키려 애를 썼으나 두문동에 모인 73인의 고려 충신들은 부름을 거부하며 농성에 들어갔으며, 그곳에 황희도 있었지만 얼마 뒤 그는 두문동을 나옵니다. 황희의 재주를 아끼고 사랑한 훗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의 간곡한 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같이 있던 두문동 72현의 청이 더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황희에게 "당신은 나가서 백성을 돌봐야 한다"는 말로 황희를 설득한 것입니다.
육룡이 나르샤 황희